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문단 편집) == 생애 == || [[파일:12670373_795.jpg]][br]8살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1906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폴란드계 이민자 3세로 태어났다.[* 쇼스타코비치의 할아버지 볼레스와프 쇼스타코비치는 본래 폴란드인이었으나 1863년 폴란드에서 일어난 1월 봉기 이후 시베리아로 이주했다.] 여덟 살 때부터 어머니에게서 [[피아노]] 연주법을 배우기 시작했고, 이내 피아니스트가 되어도 좋겠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능숙해졌다. 10대 때부터는 작곡도 시도했는데, 제대로 완성한 것은 드물지만 1905년의 혁명이나 기타 역사적인 사건들에서 소재를 취하는 등 음악과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미 이 때부터 본인의 음악적 재능을 인지하고 꽤 야심을 품었던 듯하다. [[블라디미르 레닌|레닌]]이 주도한 공산주의 혁명 직후인 1919년에 고향인 페트로그라드(개명된 지명) 음악원에 피아노와 작곡 전공으로 입학했고, 각각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와 막시밀리안 슈테인베르크를 사사했다. 재학 중 여러 편의 피아노곡과 [[실내악]]을 써서 직접 초연할 정도로 뛰어난 소양을 보였으며, 원장인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도 그를 각별히 챙겨주었다고 한다. || [youtube(S4o6d5H0Wbs)]13살(1919)경에 작곡된 스케르초 F#단조 op.1[* 13살에 쓴 작품이지만 이미 개성이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으며, 상당히 조숙한 오케스트레이션을 보여준다. 첫 작품번호가 붙은 곡이 '스케르초'라는 점에서 그의 창작 성향을 암시한다는 말도 있다.] || 그러나 혁명기에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면서 상당히 곤궁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으며[* 그도 그럴 것이, [[적백내전]] 당시의 러시아 국내의 경제적 참상은 심각한 것이었다.] 이는 유복한 유년기를 보냈던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 같은 선배 세대 작곡가들과 다른 점이었다. 글라주노프가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음악원 생활을 이어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형편이 어려웠던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학교 측에서 슬그머니 지원을 끊으려 하자, 노발대발하며 이를 직접 무마시켰다고 한다. 루나차르스키나 [[고리키]] 등 당시 영향력 있던 인사들에게 편지를 써서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특별 배급을 부탁하기도 했다.] 어린 쇼스타코비치는 영화에 맞춰 피아노를 연주하는 극장 아르바이트 등으로 가족을 부양하였고, 그 와중에 틈틈이 자신의 졸업작품이 될 교향곡을 작곡하였다. [[교향곡 제1번(쇼스타코비치)|교향곡 제 1번]]은 1925년에 완성되었고, 이는 러시아 역사상 두 번째로 10대 작곡가가 쓴 교향곡이라는 점에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스승 글라주노프는 16세 때 첫 교향곡을 써서 갈채를 받았다.] 작품성에 있어서도 완성도와 독창성이 상당히 뛰어나서 페트로그라드에서 초연된 뒤 몇 년 사이에 서방 국가들에서도 널리 연주될 정도였고, [[프로코피예프]]나 [[알반 베르크|베르크]] 등 당대의 작곡가들도 주목했다고 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이 첫 성공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작곡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 [[파일:Dmitrij_Dmitrijevič_Šostakovič_(Дми́трий_Дми́триевич_Шостако́вич).jpg]][br]1927년에 촬영된 21세의 쇼스타코비치. || 하지만 피아니스트의 꿈도 버리지 않았는데, 1927년에 제1회 [[쇼팽 콩쿠르]]에 참가했으나 명예상을 타는 데에 그쳤다.[* 1위는 친구인 레프 오보린이 차지했다. 피아니스트로서의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평가는 '기교는 완벽하나 감정 표현 면에서 다소 단조롭다' 였다고.] 쇼스타코비치는 전문 피아니스트로서의 길에는 흥미를 접었지만 피아노 연주는 계속했으며, 주로 자작곡 연주에 매진해 [[https://web.archive.org/web/20090818080149/http://emiclassics.com/groc/releases11/shostakovich.html|녹음]]도 여럿 남겼다.[* 쇼스타코비치의 남아있는 피아노 연주들은 박자가 조급하리만큼 빠른 것들이 많고, 다소 강박적인 리듬감을 보여준다.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리흐테르]]도 그와의 연주에서 애를 먹었다고.] 1920년대 후반에는 꽤 전위적이고 진보적인 작곡가로 평가받았고[* 서구의 신 빈 악파에 비길 바는 아니지만, 소련 내에서는 상당히 튀는 성향이었다.], [[러시아 혁명]]과 [[레닌]]을 찬양하는 교향곡 제 2번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며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단악장의 합창 붙은 교향곡 두 곡(2번과 3번)이나 [[니콜라이 고골]]의 풍자 소설을 각색한 오페라 '코' 등을 발표해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보수적인 음악인들 사이에서는 형식주의라는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는데, 이것이 훗날 큰 재앙의 시발점이 되었다. 1934년에는 두 번째 오페라인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그의 음악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게 된다. 오페라는 초연 당시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며 해외에도 연주되었으나, 어느 날 소련 최고의 권위를 지닌 신문인 [[소련 공산당]] 당간지 [[프라우다]]에 '음악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당의 비판 기사가 올라왔다. 비판이 아니라 협박에 가깝게까지 들리는 이 비평은 작성자가 표시되지 않았는데, 이 경우 공산당의 공식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오페라를 관람하던 스탈린이 공연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온 사건 이후 나온 기사였기에, 스탈린이 직접 썼거나 적어도 깊게 개입한 것이 아니냐는 소리가 있었다. 며칠 후에는 그의 발레 '맑은 시내'에 대한 혹독한 비판문이 게재되었고, 이로써 쇼스타코비치가 어찌됐든 높으신 분들에게 찍혔다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맑은 시내'는 '맥베스 부인'과 달리 단순하고 온건하게 작곡된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더 위협적인 결과였다. 당국은 쇼스타코비치를 결국 파멸시키지는 않았으므로, 결국 '튀는 방식으로 작곡하는 것은 포기하되, 자신의 개성을 저버리고 단순하고 뻔한 작품으로 대충 넘어갈 생각은 하지 마라'가 그들의 숨은 의중이었을 것이다. 당시 막 귀국한 [[프로코피예프]]를 '길들일' 때에도 이러한 기준이 적용되었다.] 당시는 [[이오시프 스탈린|스탈린]]의 [[대숙청]]이 벌어지던 시기로, 일반인은 물론 유력 정치인에서 저명한 문화계 인사까지 가리지 않고 별다른 이유없이 잡혀가 죽임을 당하던 시절이었다. 당장 쇼스타코비치 자신의 친지들이나 후원자들[* 메이예르홀트나 [[투하쳅스키]] 등.]이 비밀경찰에게 잡혀가고 있었고, 주위의 사람들이 쇼스타코비치와 접촉하는 것을 꺼리게 되었다. 패닉에 빠진 쇼스타코비치는 결국 자신이 쓴 파격적인 구성의 [[교향곡 제4번(쇼스타코비치)|교향곡 제4번]]의 초연을 포기한다. 쇼스타코비치는 어떻게든 자신이 변화하였다는 음악적 응답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고, 사활을 걸고 [[교향곡 제5번(쇼스타코비치)|교향곡 제 5번]]을 작곡한다. 이는 작곡가 본인의 고난을 표현하는 듯하면서도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암시하는 팡파르로 귀결되는 베토벤적인 구성의 대작이었으며, 쇼스타코비치의 처지에 동정적이었던 사람들은 물론 당국자들까지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므라빈스키]]의 지휘로 이루어진 초연은 갈채가 40분 이상 이어진 대성공이었으며, 당국은 쇼스타코비치가 비판 끝에 '어느 정도 변화하였음'을 받아들이고 더 이상 압박하지 않게 되었다.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첫 정치적 위기에서 목숨을 부지하였고, 모교인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도 임용되었다. 이후에는 [[현악 4중주]] 등의 전통적인 [[실내악]]에도 손을 대기 시작한다. || [[파일:external/markdoran.files.wordpress.com/shostroof.jpg|width=600]][br][[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방공감시원과 의용소방대로 복무하던 당시의 사진.[* 사진 오른쪽에 있는 안경 쓴 사람이 쇼스타코비치다.] || [[제2차 세계대전]] 초기에는 러시아 본토에 전쟁의 영향이 거의 미치지 않았으나, 1941년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면서 쇼스타코비치가 거주하던 레닌그라드도 위험해지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초기에는 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위의 소방헬멧을 쓰고 있던 사진이 그때다. 소련군으로 징집되는 대신 방공감시원과 의용소방대로 활동할 적이다. 이때 교향곡 제7번을 작곡하였지만, 결국 10월에 포위망이 잠시 뚫릴 때 쿠이비셰프[* 現 [[사마라]]]로 피신했고, 거기서 교향곡 제7번을 초연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포위된 도시의 시민들이 겪은 지옥 같은 고난을 생각해보면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물론 피난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독일군이 유리했던 독소전쟁 초반, 철통같이 포위한 도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가 유일했는데 이마저도 독일군의 공격에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아무튼 이 곡은 당국에 의해 '레닌그라드'라는 제목이 붙었고, 소련 뿐 아니라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에서도 수없이 방송되어 승리를 기원하는 음악의 상징이 되었다. 전황이 호전되자 1943년에 다시 거주지를 [[모스크바]]로 옮겼고,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교수로 재직하면서 7번보다는 좀 더 비극적이고 거친 교향곡 제8번을 비롯해 전쟁의 경험을 다룬 작품들을 계속 창작했다. 그러나 1945년에 소련이 승전한 뒤 발표한 교향곡 제 9번은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베토벤)|같은 번호 작품]]을 기대한 이들의 입맛에 전혀 맞지 않았고, 이내 스탈린의 심복이자 소련 문화계의 거두였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비판(일명 "즈다노프쉬나")에서 비판 첫머리에 오름으로써 두 번째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사실 즈다노프는 쇼스타코비치 작품부터 비판한 것은 아니었다. 바노 무라델리라는 비교적 무명인 작곡가가 쓴 '위대한 우정'이라는 오페라가 스탈린을 빈정 상하게 했다고 해서 시작되었는데, 이내 소련의 모든 음악계로 파급되었다. 오늘날 무라델리는 사실상 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작곡가이며, 중요하지도 않은데 그냥 구실 제공만 담당한 범용한 인물이란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 때는 쇼스타코비치만이 아니라 그의 선후배와 동료들인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아람 하차투리안]], [[니콜라이 먀스콥스키]], 비사리온 셰발린, 가브릴 포포프 같은 작곡가들까지 연루되어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았고[* 중진급 작곡가 중 하나인 [[드미트리 카발레프스키]]는 명단에서 자신을 빼기 위해 약삭빠르게 처신하여 결국 비판은 면했다.],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원 교수직도 내놓고 전쟁을 소재로 한 선전 영화의 음악을 붙이거나 '숲의 노래' 같은 정권 영합형 작품의 작곡에 주력하면서 후폭풍을 피해야 했다. 그러나 발표를 미루면서 몰래 실내악이나 교향곡 등도 창작하고 있었고, 1953년에 스탈린이 죽은 직후 교향곡 제10번을 발표하면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깼다. 혹자는 "저승사자가 쇼스타코비치를 잡아가야 하는데 스탈린을 잡느라 못 잡아갔다"고도 한다.[* 쇼스타코비치 이전에 이미 그의 선배인 먀스콥스키가 27곡이라는 경이적인 숫자로 [[9번 교향곡의 저주]]를 깨뜨린 바가 있지만, 그의 교향곡이 오늘날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관계로 그를 신기원을 이룩한 작곡가로 인정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먀스콥스키 말고도 베토벤 이후에 9곡 넘게 교향곡을 작곡한 작곡가는 꽤 많은데, 이 9라는 숫자는 어디까지나 당대 최고 수준의 작곡가들의 메이저 트랙에 한정된 사안이고 평범한 작곡가들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이다.][* 참고로 메이저 트랙과는 상관없지만 그의 스승인 [[글라주노프]]도 하필 교향곡을 9곡만 남겼다. 그나마 9번은 미완성.] 프로코피예프가 공교롭게도 스탈린과 같은 날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1953년 이후로 쇼스타코비치는 사실상 소련 음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 위상이 확고하게 굳어졌다. 스탈린이 사망하고 오래지 않아서 이미 문화적으로 '해빙'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쇼스타코비치에 대한 연주금지와 비판은 점점 해제되었고, 이 때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쇼스타코비치는 프랑스나 미국 등 서방 세계에 연주 여행을 다니고,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1960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하면서 논란이 일어났는데, 입당이 자의였는지 아니면 타의에 의한 강제 입당이었는지는 아직도 불명확한 상태다.[* 쇼스타코비치의 주변인들은 대체로 타의에 의한 강제 입당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어쨌든 쇼스타코비치의 공산당 입당에 적지 않은 지인들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고, 특히 정권에 비판적이던 후배 작곡가들 사이에서 입지가 약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입당 전후에 쓴 교향곡 두 곡(11번과 12번)도 1905년과 1917년의 혁명에 대한 부제를 붙였기에, '결국 쇼스타코비치는 소련 정권의 어용 작곡가가 되었다'는 비판이 서구에서도 일기 시작했다. 하지만 현악 4중주 제8번 같이 분명한 공포와 고통을 표현한 내면적인 작품도 만들었고, 소련 내에서는 공공연한 만행이었지만 공식 언급이 금기시되었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교향곡 제13번 '바비 야르'를 작곡하는 등 반골 정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 초연을 [[예브게니 므라빈스키|므라빈스키]]가 거절하면서 둘 사이는 완전히 벌어지게 된다.] 이렇게 논쟁적인 창작 활동을 계속하는 와중에 쇼스타코비치는 점차 쇠약해졌고, 특히 오른손에 마비 증상이 오면서 피아노 연주와 악보 작성 등이 어려워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거기에 1966년에는 심장마비를 겪으며 생명의 위기를 넘겼다. 건강상태가 나빠짐에 따라 그의 작품도 점점 더 어두워지고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게 되었는데, 말기의 교향곡인 14번은 죽음을 주제로 쓰여진 시를 가사로 하고 청년 시절에 도입했던 서구의 현대음악 기법을 응용하는 등 체제 도전적인 면모를 극한까지 끌어올린 작품으로 논란을 빚었다. 1970년대에는 폐렴에 심근경색까지 발병했고, 결국 1975년 [[모스크바]]의 병원에서 비올라 소나타를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4일 뒤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사후 3일 뒤에야 알려졌는데 당시 소련 연방공산당 서기장이었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가 크림반도에서 휴가중이었고, 그의 공식발표에 따라 정말 역사에 길이 기억될 '위대한' 작곡가였는지 단순히 '뛰어난' 작곡가였는지가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브레즈네프는 마침내 휴가에서 돌아와 쇼스타코비치는 "우리 시대의 위대한 작곡가"였다고 전세계에 알렸다.] 많은 인사들의 추모 속에 유해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 [[파일:Shostakovich-coffin-002-.jpg]][br]쇼스타코비치의 장례식. [[아람 하차투리안]]이 고인의 손에 입맞추고 있다.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